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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아우
온이퍼브
김동인
2013-02-19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고구려는 주몽이 세운 나라로 처음에는 그가 낳은 아들 유리가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 가 왕의 후계자가 되면서 소서노의 두 아들에게는 주몽(朱蒙)이 죽기 전까지 유리에 대한 충성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왕위에 대한 이렇다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두 형제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각각의 나라를 찾아 은거지로 떠나게 됩니다.
소설『형과 아우』는 삼국사기(유사)의 기원에서 근거한 시초의 건국설화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형제애(兄弟愛)를 다루고 있으며, 진실로 감명 어린 이야기로 그 이상의 감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견해가 다른 역사적 고증 사실은 제쳐놓더라도, 주변 역사적인 주변 일화를 소설로 풀어쓴 작품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을 잠시라도 느끼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지주이자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기독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에 차례로 다니다가 중퇴하고,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과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17년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했다가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9년 2월 주요한ㆍ전영택ㆍ최승만ㆍ김환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인 《창조》를 발간, 「약한 자의 슬픔」 「배따라기」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귀국했는데, 동생 김동평의 3ㆍ1만세운동 격문의 초안을 잡아준 일로 수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줄곧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며,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과 시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1921년 경영난으로 인해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한 뒤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1924년 첫 창작집인 『목숨』을 출판하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간행했으나, 다음 해 제5호로 폐간했다.
1926년에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관개사업에 손을 댔고, 1928년에는 동생과 함께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그의 궁핍은 극단으로 치달았을 뿐 아니라 그 사이 아내도 떠나고 말았다. 그런 동안에도 김동인은 「광염 소나타」 「운현궁의 봄」 「붉은 산」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았다.
광복 이후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그는 병마와 싸우다가 6ㆍ25전쟁 중에 서울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