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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책만드는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길주 옮김
2013-03-19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노르웨이 북클럽 선정 세계 100대 명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현대 영미권 작가들이 뽑은 애독서 1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풍속도와 여성의 애정 심리를 밀도 있게 묘사한 명작으로,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자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톨스토이의 신념과 가치관은 물론 당대의 사회상과 인간의 감정까지 집약되어 있는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도 대중적, 문학적으로 정점에 이른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에 책만드는집에서 펴낸 『안나 카레니나』는 한 권으로 간추린 편역본이다.
톨스토이가 지천명을 앞두고 마무리한 『안나 카레니나』는 1878년 출간된 이후, 영화와 드라마,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여러 예술 장르로 재탄생하면서 톨스토이의 위대함과 작품의 가치를 증명시켰다. 50세 이후 톨스토이는 작품 활동보다 사상가로서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에는 작가로서의 그의 결혼관, 종교관, 인생관, 나아가 세계관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사의 거의 모든 드라마를 함축하는 방대한 서사를 자랑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당시의 귀족사회를 무대로 유부녀 안나 카레니나의 불륜과 파멸을 그린 장편소설로, 주인공 안나를 통해 사랑과 질투, 욕망, 용서와 분노, 삶과 죽음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지닌 양면성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여인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는 그러한 양면성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나름의 고뇌와 불행을 안고 끊임없이 번뇌한다. 특히 안나와 대비되며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끄는 성실한 농부 레빈의 이야기에서는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쟁과 평화』에서 보여준 러시아 사실주의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면서도, 『부활』에서 보이는 계몽적이고 종교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색채도 지니고 있다. 그 중간에 쓰인 이 소설은 톨스토이 문학세계의 전반기와 후반기가 맞닿은 곳에 놓여 있다. 특히 톨스토이는 이 무렵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함으로 정신적 갈등을 겪었는데, 작품 곳곳에서 그러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뛰어난 구성력과 사실적이면서도 미적인 묘사,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시대정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1828년 9월 부유한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자란다. 1844년 카잔대학에 들어갔으나 1847년 대학 교육에 실망해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 영지로 돌아와 농사 개혁을 생각하는 한편 문학에 정열을 쏟는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도박을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이 때문에 평생 자괴감을 느꼈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과 사상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851년 군대에 입대해 체첸 공격과 크림 전쟁에서 활약한 그는 제대 후 작가로서 순조로운 길을 걷다가 1857년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농노제 폐지를 주창하고 농민학교를 개설하는 등 농민 계몽에 힘쓴다. 1862년 열여덟 살의 소피야와 결혼한 후 불멸의 걸작 《전쟁과 평화》(1869)를 쓴다. 1870년 초부터 다시 교육 활동에 힘을 쏟으며 또 하나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1877)를 내놓는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종교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고백록》(1879)은 이러한 내적 성찰이 집약된 책으로, 톨스토이 사상의 분기점으로도 여겨지며 이후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아나키즘으로도 평가되는 ‘톨스토이주의’라 일컬어진다. 잇따라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1889) 등의 수작을 내놓았으며, 1908년 80회 생일에는 전 세계에서 축하 인사를 받을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이자 인도주의자인 남편의 이상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아내와 저작권 포기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대립했고 1910년, 주치의를 데리고 가출을 감행했다가 급성 폐렴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