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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휴먼앤북스(Human&Books)
백석 지음, 이숭원 엮음
201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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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의 미학’을 실현한 백석시의 매력!
휴먼앤북스의 <한국대표시인 시선> 여섯 번째 시선집인,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발간되었다.
백석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90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서정 미학을 개척한 시인이다. 백석은 토속적인 구어를 시의 중심부로 끌어올리고 전근대적인 민간신앙을 근대시의 영역에 끌어들여, 한국인 고유의 사유와 삶의 원형을 찾는 작업을 벌였다.
백석은 평북 지방의 토착어를 기반으로 고유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폭넓게 구사하여 당대의 삶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냈다. 또 비유의 측면에서 구어적 표현을 차용한 직유법을 활용하였으며, 소재를 짝을 지어 열거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운율감을 창조한 데 그 문학사적 의의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백석의 토속적이면서도 소박한 방법을 ‘눌변의 미학’이라고 규정한다면, 백석시는 이 ‘눌변의 미학’을 바탕으로 물질적 계량주의가 확대되는 시기에 고립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소외의 미학’을 실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선집에는 백석의 대표작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등 엄선된 시들이 현대어 표기법으로 실려 있으며, 책임편집을 담당한 문학평론가 이숭원 교수의 해설을 통해 백석시의 진의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1912년 7월 1일(음력 추정)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 백석(白石)의 외모는 한눈에도 두드러진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사진을 봐도 그의 모습은 매우 모던하다. 서구적 외모에 곱슬곱슬한 고수머리.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그의 머리 모양은 참 특이하다. 1930년대에 그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감각이란 얼마나 현대적인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는 시쳇말로 외모와 문학을 새롭게 디자인한 모던 보이이자 우리말의 감각을 최대치로 보여 준 시인이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백석(白石)으로 활동했다.
1918년(7세), 백석은 오산소학교에 입학했다. 동문들의 회고에 따르면 재학 시절 오산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9년 오산 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의 바뀐 이름)를 졸업하고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되어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성 생활을 시작한다.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의 편집을 맡았고 ≪조선일보≫ 지면에 외국 문학 작품과 논문을 번역해서 싣기도 했다. 1935년 8월 30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창작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잡지 ≪조광(朝光)≫ 편집부에서 일한다.
1936년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다. 1월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이었다. 1936년 4월,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간다.
1940년 1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한다. 1940년도에 들어와 백석은 한국 현대시 최고의 명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힌다. 시적 반경도 역사적·지리적·정신적으로 대단히 깊고 넓어지기 시작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한다. 1946년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 비서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10월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남한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취한 1988년까지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완전히 매몰되고 만다.
한국전쟁 직후 백석은 평양 동대원 구역에 거주하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 문학 번역 창작실’에 소속되어 러시아 소설과 시 등의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다. 1962년 10월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한다. 1996년 1월 7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제1부 1935~1936
산지 / 가즈랑집 / 여우난골족 / 고방 / 모닥불 / 고야 / 오리 망아지 토끼 / 주막 / 적경 / 미명계 / 성외 / 쓸쓸한 길 / 여승 / 수라 / 통영 / 오금덩이라는 곳 / 가키사키의 바다 / 정주성 / 정문촌 / 여우난골 / 통영 / 연자간 / 탕약 / 남행시초 1: 창원도 / 남행시초 2: 통영 / 남행시초 3: 고성가도 / 남행시초 4: 삼천포
제2부 1937~1939
북관 / 노루 / 선우사 / 산곡 / 바다 / 추야일경 / 산숙 / 백화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석양 / 고향 / 절망 / 개 / 외갓집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삼호 / 물계리 / 대산동 / 가무라기의 낙 / 멧새소리 / 박각시 오는 저녁 / 너먼집 범 같은 노큰마니 / 동뇨부 / 안둥 / 함남 도안 / 서행시초 1: 구장로 / 서행시초 2: 북신 / 서행시초 3: 팔원 / 서행시초 4: 월림 장
제3부 1940~1948
목구/ 수박씨. 호박씨 / 북방에서 / 허준 / '호박꽃초롱' 서시 / 귀농 / 국수 / 흰 바람벽이 있어 / 촌에서 온 아이 / 조당에서 / 두보나 이백 같이 /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 / 칠월 백중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해설 | 백석 시의 꿈과 힘 - 이숭원
백석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