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전자책

검색
토끼와 해파리 (커버이미지)
알라딘

토끼와 해파리

아작

전삼혜 (지은이)

2022-11-01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청소년 SF의 기수 전삼혜 작가, 8년 만의 SF 소설집
세상을 이루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


전삼혜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별일 아닌 작은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것을 문단문학에서는 ‘소품(小品)’이라고 부르는데, 소품이라는 말 속에는 ‘별거 아닌 내용’이라는 뉘앙스가 은연중에 끼어들어 있다.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얘기는 별거 아니라는 소리다. 소품이 아닌 대작, 뭐… 《태백산맥》이나 《토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통시적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작품을 써야 대작이라는 얘기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제인 오스틴과 같은 여성작가들이 항상 마주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이름이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작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별거 아니고 쓸모없다는 식의 폄하.
전삼혜의 소설은 그런 폄하에 정면으로 들이댈 수 있을 놀라운 ‘소품’이다.

전삼혜의 소설이 이토록 크면서도 작을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사실은 작고 소박하다는 사실을 작가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삼혜의 소설 속에서는 악당도 거대하지 않고, 선인도 거대하지 않다. 심지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 악당조차도 그 욕망은 어이가 없을 만큼 소박하다.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작고 사소한 실수를 회복하기 위해서, 작고 사소한 일들을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전삼혜 작가가 청소년 소설을 오래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빛나는 사소함에 있을 것이다. 청소년 시기가 가장 빛나는 이유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축적해서 빛나는 자기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 이서영, 소설가

작품해설

세상을 이루는 작고 반짝이는 것들


어릴 적 ‘소설’이라는 글자에 관해 처음 썰을 풀어줬던 선생님은 소설(小說)이 작은 이야기라고 했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혹은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고 사소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한다며. 그 말을 들은 나는 궁금했다. 세상은 소설가가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대하고, 선생님, 선생님, 하며 칭하는데 왜 소설은 그토록 작은 이야기인지.
인간이란 무릇 큰 이야기보단 작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사람을 제일 들뜨게 만드는 건 보통 가십이고, 거대하고 장구한 역사의 흐름보다는 그 뒷면에 있다는 사실인지 아닌지도 잘 모를 야사들이 재미있다. 작은 이야기들이 이토록 흥미로운 이유는, 삶의 특수성이나 핍진성이란 죄다 작은 이야기 안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역사라고 해도 조그마한 이야기들의 군집이고, 제아무리 굉장한 행성이라고 해도 자잘한 원자들의 집합체다. 허구한 날 인용되는 그놈의 칼 세이건은 여하간 위안이 되는 구석이 있다. 우리라는 지질한 인간들조차 별을 구성하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
물론 작은 걸 모아놓은 게 죄다 큰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이야기 속에는 눈뜨고 못 봐줄 꼴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 눈뜨고 못 봐줄 꼴들이야말로 말하자면 ‘찐’이다. 인간의 삼라만상과 불쾌 혹은 유쾌는 모두 이 작은 이야기들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전삼혜가 꼭 작은 이야기만 잘 쓰는 작가는 아니다. 2021년 출간되었던 전삼혜의 옴니버스 장편소설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꼭 작은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소설은 섬처럼 떨어져 있는 룸메이트들로 구성된 광막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섬’이다. 아무리 거대하고 광활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주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의 이야기가 된다. 전삼혜의 시선은 소설가의 것이고, 소설가는 작은 섬들이 촘촘히 모여서 만들어지는 우주를 지켜보는 ‘작은 이야기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삼혜의 소설은 바로 그 점에서 사랑스럽다.
전삼혜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별일 아닌 (아니, 때때로 큰일일 때도 있지만, 이 점은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자) 작은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것을 전삼혜와 내가 전공한 문단문학에서는 ‘소품(小品)’이라고 부르는데, 소품이라는 말 속에는 ‘별거 아닌 내용’이라는 뉘앙스가 은연중에 끼어들어 있다.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얘기는 별거 아니라는 소리다. 소품이 아닌 대작, 뭐… 《태백산맥》이나 《토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통시적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작품을 써야 대작이라는 얘기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제인 오스틴과 같은 여성작가들이 항상 마주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이름이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작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별거 아니고 쓸모없다는 식의 폄하.
전삼혜의 소설은 그런 폄하에 정면으로 들이댈 수 있을 놀라운 ‘소품’이다.
〈안드로이드 고양이 소동〉은 전형적으로 소품이라고 불릴 법한 귀여운 이야기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안드로이드에 죽은 고양이가 등장한다는 꿈과 같은 설정은, 모르는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각자가 사랑했던 고양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게 만든다. 다른 이야기들 중에서도 엄청나게 거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표제작인 〈토끼와 해파리〉는 사람들이 애를 하도 안 낳아서 말도 안 되게 줄어든 세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의 귀여운 우정을 다루고 있다. 장소조차 경기도 정도의 지방 소도시로 추정되는 어느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장편소설 《궤도의 끝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와 같이 거대한 이야기들도 작은 이야기로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게 수렴한다는 것이다. 작은 이야기가 모여서 큰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전삼혜의 소설은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이야기의 이면을 작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안에 신기하게 욱여넣는다.
제7회 SF 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에 빛나는 〈고래고래 통신〉은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우기는 시각장애인 청소년 이야기(근데, 이제 그게 진짜인)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초음파로 안전걸쇠를 잘라버릴 수 있는 외계인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그야말로 사회문제가 될 법한데 전삼혜의 소설 속에서 이 외계인은 그 굉장한 능력을 이제 막 생긴 자신의 청소년 친구를 구하는 데 사용한다. 〈성심당 사거리 메타버스 결투에 관하여〉는 어떤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천사와 악마가 펼치는 세기의 대결!’은 대전이라는 지방 소도시의 빵을 사기 위해서, 심지어는 메타버스 속에서 벌어진다. 아무도 이 세기의 대결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뿐더러, 매번 발생하는 굉장한 능력들(성경 구절을 그대로 재현하고, 시간을 뒤로 돌리는 등)은 서로의 것끼리 맞부딪혀서 상쇄되어버린다. 결국 이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연대감만 확인하며 흩어지고 만다. 그나마 타자라는 거대공동체에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소설이 〈퍼펙트 페이스〉일 텐데, 모든 한국인들이 위인의 얼굴을 따라 성형을 하게 만든 이들의 작은 욕망은 그냥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었다.
전삼혜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잘 안 쓰이는 학술적 용어로 말하자면, ‘핍진’하다. 찐이라는 소리다. 그들의 욕망은 세상을 바꾸거나 거대 악 같은 외형을 띠고 있거나 진영에 귀속되어 있지 않다. 작고 소박하며 일상적이다. 그렇기에 이 작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에 나타나는 ‘진실한 감정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건 바로 연대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며 본질적인, 그러나 만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귀한 것. 전삼혜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각자의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타인과의 연대감을 통해 세상과 자신의 삶을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바꾼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에도 잘 띄지 않을 만큼 자그마한 한 걸음이다.
〈고래고래 통신〉, 〈토끼와 해파리〉, 〈지정석 크리티컬 슈퍼스타〉에는 전삼혜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한 플롯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내가 유명한 문학평론가라면 이런 주인공과 플롯을 피카레스크식 구성처럼 ‘전삼혜식’ 구성이라고 이름 지어서 다른 소설을 평하는 데에도 써먹을 것이다. 소설 속의 청소년들은 각자의 작은 욕망에 솔직하고, 타인의 작은 욕망에 예민하다. 그들이 꿈꾸는 건 세계에서 서로를 온전하게 지켜내는 것이며, 사소하고 우스운 연대의 힘으로 그들은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서 거친 세상에서 연대감을 확인하고 서로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다. 상대는 사회적 시선(〈토끼와 해파리〉)일 때도 있고, 못된 또래 집단(〈고래고래 통신〉, 〈지정석 크리티컬 슈퍼스타〉)일 때도 있지만 악도 그렇게 강력하고 끔찍하진 않다. 악에도 악이 될 만한 안쓰러운 이유가 있다. 전삼혜의 연대감은 〈고래고래 통신〉 속 강솔의 한마디로 묶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왜 불쌍하다는 감정이 역겹게 느껴질까.” 이들은 모두 어딘가 나사가 좀 빠져버린 사람들이지만 서로를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 누구도 위에서부터 타인을 내려다보지 않고, 정면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편, SF 작가로서의 전삼혜의 장점은 자신이 그리는 인물들의 성향과 퍽 닮아 있다. 〈성심당 사거리 메타버스 결투에 관하여〉가 보여주는 SF적 상상력이 전형적이다.
“상상 가능한 것은 뭐든지. 단, 이곳은 논리의 세계예요. 논리가 불완전하면 뭔가를 만들 수 없어요. 제가 아까 바늘을 만들어낸 이유를 설명했듯이.”
전삼혜의 SF는 일종의 코드 짜기 게임 같은 것이다. 일정한 논리가 적용되는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그 세계의 규칙에 한계점들을 부여한다. 그 한계점 안에서 인물들은 싸워야 한다. 일정한 중력이 부여된 격투게임 전장과도 같다. 슈퍼히어로지만 높은 데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다리몽둥이가 분질러지는 〈지정석 크리티컬 슈퍼스타〉의 주인공 지정석처럼, 외계인이지만 허언증 환자 취급이나 받고 사는 〈고래고래 통신〉의 이원처럼. 거대한 이야기건 자그마한 이야기건 하나의 논리를 구축해서 그 안에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건 마치 어느 프로그램의 코드를 성심성의껏 짜고 있는 개발자의 뒷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전삼혜가 만들어낸 텍스트 게임 속에는 숨어 있는 아기자기한 이스트에그도 많고, 에피소드의 뒷얘기를 볼 수 있는 소스들도 많다. 무엇보다 그는,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삼혜의 소설이 이토록 크면서도 작을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사실은 작고 소박하다는 사실을 작가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삼혜의 소설 속에서는 악당도 거대하지 않고, 선인도 거대하지 않다. 심지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 악당조차도 그 욕망은 어이가 없을 만큼 소박하다(〈퍼펙트 페이스〉).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작고 사소한 실수를 회복하기 위해서, 작고 사소한 일들을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전삼혜 작가가 청소년 소설을 오래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빛나는 사소함에 있을 것이다. 청소년 시기가 가장 빛나는 이유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축적해서 빛나는 자기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인간의 마음은 열여섯 살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더 자랐건 덜 자랐건 간에 매일의 일상과 격투해서 세상에 돌 하나 더 얹는 게 평범한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작은 일상이 세상을 구축해낸다면,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면, 전삼혜의 소설은 칼 세이건이 말한 그 인간의 본질과 가장 닮아있는 서사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별을 이루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전삼혜의 소설이 작고 반짝이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듯이.

- 이서영, 소설가

공지사항

등록된 공지사항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