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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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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지음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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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월 14일 충북 음성군 석인리(오리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갑룡(甲龍), 아명은 용구(龍九), 무영(無影)은 필명이다. 그러나 1959년 법원의 허가를 받아 필명을 본명으로 바꾸었다. 소년기를 충북 중원군 용원리에서 보내고 1920년에 상경, 휘문고등학교에 진학, 이때부터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1925년에는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위해 도일, 고학을 하다가 소설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를 찾아가 ‘무슨 일이든지 하겠으니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러나 가토 다케오가 다시 불러 그 집의 서생이 되어 혹독한 작가 수업을 한다. 당시 가토 다케오는 ≪농민 문예의 연구≫를 쓴 농민문학 이론가였고, 인기 작가였다.
1927년 19세 때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이듬해 <폐허의 울음>을 발표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1929년 귀국, 무영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썼으나 작가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자 소학교 교원, 출판사, 잡지사 직원으로 지내면서 <팔년간>, <반역자>, <착각애>, <노파>, <아내> 등을 발표했다. 한편 희곡에도 관심이 있어 ≪동아일보≫ 희곡 현상 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했다(1932). 1934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광수의 농민 계몽 소설 <흙>이 끝나자 같은 주제를 다룬 <먼동이 틀 때>를 연재했다.
1936년에는 고일신(高日新)과 결혼하였고, 친우 이흡(李洽)과 문예지 ≪조선문학≫을 창간하기도 했다. 1939년 7월 이무영은 보다 치열한 작가 생활을 하기 위해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경기도 시흥 수리산 밑으로 내려가 실제 농사를 지으며 농민 소설을 썼다. 그의 대표작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를 쓴 것이 바로 이때다.
1946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1947년에는 연세대에서 소설론을 강의했고, ≪소설 작법≫도 출간하는 등 창작과 이론으로 문단의 중진이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입대, 해군 정훈장교가 되었고, 1954년 국방부 정훈국장을 지낸 뒤 1955년에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국제 펜클럽 중앙위원, 숙명여대 대학원 강사, 단국대 교수가 되었다(1957).
1960년 4월 21일 52세 되던 해에 뇌일혈로 갑자기 타계했다. 1975년 신구문화사에서 ≪이무영 대표작 전집≫ 5권이 간행되었고, 1985년에는 출생지 음성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세워졌다. 유족으로 고일신과 그의 자녀 2남 4녀가 외국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