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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라, 기억의 원점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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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라, 기억의 원점

알렙

이치은 지음

2015-10-24

대출가능 (보유:1, 대출:0)

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흥미진진한 추리 구조로 완성된 망각-기억의 서사체, 그리고 문학적 알레고리



이치은 소설은 늘 독자의 능동을 요청한다. 읽으면서 단지 화자의 입술을 좇는 게 아니라, 뛰어넘고 앞질러 지도 그리는 힘. 이치은 소설은 세계가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고발이자 처방이 된다.

- 장은수(문학평론가)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 그리고 두 가지 시간에 관한 이야기



어느 날 키브라 호텔 방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그런데 내 앞에는 다른 사람의 신분증 네 장이 놓여 있다. 신분증의 주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자신이 연쇄살인범일지 모른다고 추리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진실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그리고 기억들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거꾸로 자신의 진짜 혹은 가짜 정체에 대해 나아가는 시간. 두 가지 시간 중에, 진짜 시간과 진짜 기억은 무엇일까? 그리고 가짜 기억을 조작하여, 그를 조롱하는 진짜 살해범은 있는가?



흥미로운 추리소설적 구성과 전개 그리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루어 온 작가 이치은의 신작 장편이 출간되었다. 꿈과 언어 그리고 소통에 관한 묵시록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였던 『노예 틈입자 파괴자』(2014) 이후 1년 만이다. 이번에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작 『키브라, 기억의 원점』은 기억/기록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연쇄살인범이 된 한 기억상실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 가면서 느끼는 공포를 그려 보이고자 했다.



소설의 내용은 영화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개와 흡사하다. <메멘토>는 기억의 불완전성, 기억과 기록 사이의 불일치나 조작 가능성을 통해, 진실과 허위의 지적 게임을 하고 있다. 기억상실자가 기억의 불완전성 때문에 기록(<메멘토>에서는 메모, <키브라, 기억의 원점>에서는 일기)을 통해, 진짜 자아 즉 정체에 나아가면서 진실과 허위의 지적 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키브라, 기억의 원점>에서는 ‘자신’이 살인범을 쫓는 형사이거나 복수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앞에는 주인 잃어버린 신분증 네 장이 놓임으로써, 그리고 자신이 그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단서가 잇달아 발견됨으로써, 자신이 연쇄살인범으로 암시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진실’ 앞에 점차 기억을 되찾아 가는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공포의 감정일까? 안도의 감정일까? 그런데, 이치은 작가는 거기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소설에서 ‘나’는 연쇄살인범이 될 수 없다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넣음으로써, 즉 거짓-조작 설정을 넣음으로써, 또 다른 반전을 향해 치닫게 한다.

이러한 소설 구조 속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치은 씨는 “내가 한 (살인) 행위”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 인물을 그려냈다. 어떤 한 화가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치자. 그는 자신이 그렸을지 모르는 그림들을 다시 본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와 논거들을 수집한 후, 그 그림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그 그림들은 그가 그린 것이 아니라고 폭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여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 그 기록(사실)마저 조작될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진짜와 가짜를 놓고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만일 다른 사람들의 증언대로 따르자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닐까? 고(故) 천경자 화백과 관련된 위작 논란, 최근 있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과 빗대어 볼 여지가 있다.

<키브라, 기억의 원점>은 확실히 살인자-살인 행위-추적-사건 해결의 구조를 지닌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심연의 근저에 자신의 주제 의식을 심어놓았다.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문학적 알레고리의 함의는 여기에 있다.



이치은 작가는 소설 집필 배경에 관하여 나눈 편집자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저는 제가 썼던 소설을 잘 읽지 못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럴 테지요. 그런데, 만일 저에게 기억상실이 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제가 썼을지 모를 소설을 제가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거기에는 세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제가 읽었을 때, 하나는 아주 잘 쓰인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제 소설들입니다. 둘은, 아주 잘 쓰인 소설인데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셋은, 제가 쓴 것인데 아주 형편없는 겁니다. (넷은, 아주 형편없는 소설을 남이 쓴 것일 텐데, 이는 제 소관이 아니겠죠.) 이 마지막 상황이 저를 끊임없이 쥐고 흔듭니다. 글을 쓰는 욕망과 또 그 글이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욕망에 딴죽을 거는 거죠. 이게 과연 쓸 만한 혹은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냐는, 제가 읽을 수 없으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작가가 자기 글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한다는 것과, 그 글이 형편 있느냐/없느냐는 다른 기준선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는 것은 사실/허위냐의 기준으로 판별해야겠지만, 그 글이 형편 있느냐/없느냐는 해석의 차원이다.

작품 <키브라, 기억의 원점>에서는 자신이 저질렀을지 모를 살인 행위에 대해 추적해 나가면서, (연쇄살인범일지 모르는) ‘나’가 급기야는 살인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조롱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첫 번째, 나는 살인범이고 그 살인의 방식은 완벽했다. 두 번째, 그 살인의 방식은 완벽했지만 그 살인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세 번째, 나는 살인범이지만 그 살인의 방식은 형편없었다. (역시 네 번째는 해당 사항이 없다.) 이 결과들 중에서, ‘나’는 결국 세 번째 결과 즉 나는 살인범이지만 형편없는 살인자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결국 ‘나’의 내면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자리 잡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조롱’하게 된다.



읽을 수 없는 책들에 대한 공포감, 쓰지 못한 소설들에 대한 죄책감



이치은 작가는 소설 구조를 늘 고심하여 고안해 낸다. <비밀경기자>와 <노예 틈입자 파괴자>는 꿈의 논리 구조를 따랐으며, <소파 씨, 아파트에 모이다>는 언어의 구조를 따랐다. 이번 소설 <키브라, 기억의 원점>은 기억의 논리 구조를 따르고 있다. 기억상실자를 등장시킨다. 기억상실자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상실됨으로 인해, 지나간 시간을 읽어내려 한다. 즉 현재의 시간을 새로운 사실들이 아닌,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에 온전히 바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모든 선형적인 시간의 자료들이 과거를 향해서만 투여된다는 것, 즉 거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사실들은 그 과거의 기억 찌꺼기들과 충돌하게 된다. 자신이 밝혀낸 과거가 내 과거가 아니라면? 이 무섭고 공포스러운 구도 앞에, 작가는 특히 연쇄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를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느냐는 극악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세계가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작가가 던진 물음



평론가 장은수 씨는, “소설에 생겨난 검은 구멍들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는 망각-기억의 서사체가 독특하게 이룩된다. 이로써 이치은 소설은 세계가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고발이자 처방이 된다.”라고 평하였다.

이치은 작가는 자신이 쓰지 못했던 과거의 소설들에 대한 죄책감을 표현해 낸다.



감히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 나를 위해서 보르헤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다. “컴퓨터에 글을 쓰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쓰다 만 글들 모두를 마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내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에도 역시 더러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더러는 그 부끄러움의 추억이 또렷한 죄책감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하드 속 죄책감은 서재 속 죄책감보다 더 쓰라리고 더 탈출하기 쉽지 않다. (작가 후기 중에서)



소설의 표면에서는 ‘기억상실에 걸린 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이면에서는 ‘자신의 글에 대한 죄책감 혹은 공포감’이 자리한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기만일 수 있다. 작품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행위로 드러나는데, 깊게 보면 이 불임 시대가 가진 도덕 불감증과도 연결된다. 이를 문학적 알레고리로 해석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사회적 함의를 띨 수 있다면, 장은수 씨의 언술처럼, “세계가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부조리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고발이자 처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위 자체, 즉 ‘누가 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정작 ‘한 일’이 형편 있냐/없냐는 것은 간과되기 쉽다.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연쇄살인범(소설가)을 통해, 자신의 살인(소설)을 재구성해 내면서, 살인의 소유권(글의 저작권)을 주장하려는 시도가 허망하게 배신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에 대해 독자가 어떤 해석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작품의 결말은 단선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독자의 능동을 요청한 채 끝나기 때문이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는 줄거리 :

기억상실자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은 무엇인가?




‘나’는 한낮에 깨어났더니, 기억을 온통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내 앞에는 네 장의 신분증과 지도 한 장과 열쇠 그리고 일기장이 놓여 있다. 나는 이 신분증의 주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그 살인들은 무관하지 않았다. 나는 연쇄살인범이거나 살인범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깨어난 곳은 키브라 호텔의 한 VIP 룸이다. 나는 내가 더 이상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일기장에 내가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키브라(Kiblat, Qibla). 이슬람 교도가 예배 시에 향하는 곳을 알려주는 표시이다.)

나는 내가 깨어났을 때 옆에 같이 놓여 있었던 지도 한 장에 그려진 붉은 동그라미들과, 신분증 네 장의 의미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살해되었고, 두 사람은 아직 모른다. 나는 내가 저질렀을지 모를 살인의 목록을 적어 나갔다. “두 건의 반사회적인 살인이 일어났고 그 두 명 희생자의 신분증명서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다.”

물론 나는 내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기로 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내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살인범이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애초부터 사라져 버린 나의 차의 운전사를 찾아 나섰고, 그러다가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여러 가지 단서들을 추적하고 정보를 얻은 끝에, 나는 세 번째 살인의 희생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살인자일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얻었다.

나는 내가 살인자일 것이라는 사실을 캐기 위해, 웨이터나 운전사 그리고 연두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를 추적하기로 했다. 물론 한편으론 내 살인 습성을 참고하여 네 번째 희생자도 찾기로 했다. 내가 추적하면 할수록 모든 사실들의 관계를 풀 실마리를 쥐고 있는 웨이터 놈(웨이터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그 분’의 존재를 알게 된다.)은 점점 더 꽁꽁 숨었다. 사라져 버린 운전사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결국 나는 웨이터 놈(헬싱키 볼링장 주인)을 찾아냈지만, 웨이터 놈은 ‘내가 살인범이 될 수 없다’며 실컷 조롱하고는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

나는 점점 더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어제의 기록과 오늘의 기억 사이 길을 잃었다. 나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로 했고, 그것을 네 번째 희생자에게서 발견해 내는 것으로 확인하려 했다. “어제 일기는 내가 그저께 창고를 떠나며 네 번째 신분증명서 속 남자에게 내 미래는 마치 기억처럼 정확하지, 그렇지 않니?라고 물었다고 진술하는데, 나는 그게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제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이다.)

나는 키브라 호텔의 뒷면에서 드디어 ‘그 분’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그리고 소위 ‘그 분’에게 내가 저질렀던 살인, 내가 했던 일들을 나에게서 왜 빼앗아 가느냐고 묻지만, 그 분은 , “그건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얘기지요. 핵심은 이런 거라고요, 살인 자체가 살인자보다 훨신 더 중요하다는 거. 그쪽은 그걸 간과하고 게신 거예요.”라고 답한다. ‘그 분’은 “당신에게 키브라는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는 키브라가 무슨 의미인지 말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다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 분’은 그런 나를 실컷 조롱하고 실신시킨 후 결국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살인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나는 체포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수였다. 경찰에게 자수 편지를 썼다. “이제는 만일 귀하께서 제 진술을 보시고 제가 진범이라는 것을 확신하시고 저를 체포하러 아래의 주소로 와 주신다면 물론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키브라에서 시작되었고, 다시 키브라에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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