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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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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알렙

문성원 지음

20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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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한국 문학사의 가장 개성 있는 인물,
구보 씨가 지금 여기에 서서 세상을 본다면?


∥ 1934년 박태원이「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최인훈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연작을 발표하여 구보 씨를 다시 불러냈다. 주인석은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라는 부제로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연작소설집을 냈다. 2002년에는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앨런 테인 더닝&존 라이언, 그물코)라는 환경 책이 나왔다.
∥ 그리고 2013년에 구보 씨는 철학자로 다시 등장하였다.

20세기 소설가 구보 씨가 근대 조선의 지식인상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에 다시 철학자로 태어난 구보 씨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을 어떻게 볼까?
구보 씨가 재치 있는 입담과 유쾌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돌아왔다. 문학과 철학, 현실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자 구보 씨는 경쾌한 사유의 향연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성원 교수(부산대 철학과)는 철학의 현황과 지평을 보여주기 위해, 구보 씨라는 캐릭터를 철학자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구보 씨를 통해 벌거벗음의 사유를 선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너머를 지시하고자 하는 사유의 몸짓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벌거벗음, 뱀파이어, 크기와 소통, 동물과 인간 등 현대 철학의 독특한 영역을 거침없이 횡단하며, 유쾌한 생각의 담화들을 펼쳐보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이었던 ‘구보 씨’를 다시 등장시켰다. 구보 씨는 처음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인 박태원에 의해 등장했을 때부터, 소시민이자 지식인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최인훈의 ‘구보’도, 1990년대 주인석의 ‘구보’도, 시대를 걱정하는 반성적인 지식인이었다. ‘구보 씨’만큼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던 사람도 찾기 힘들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자 ‘구보 씨’는 저자의 생각을 대변하면서도 현실 공간이 아닌 가상현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체험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철학의 대작들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철학을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문성원 교수도 어려운 내용을 딱딱하게 하지 않고, 쉬운 이야기를 경쾌하게 하기 위한 방식으로 ‘구보 씨’를 철학자로 등장시켜 그의 연인인 Y와의 담화를 통해, 세상의 온갖 실재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문성원 교수는 전작 <해체와 윤리> <배제의 배제와 환대> 등에서 해체의 철학과 윤리의 철학을 접목하는 등 현실 철학의 새로운 조망을 시도한 바 있다. 논증적 글쓰기와 학문적 엄정함으로 철학의 첨예한 핵심 부분만을 연구해 오던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논증 대신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방식을 택한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원래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므로, 어렵고 골치 아플지 모른다. 오늘날 철학자는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며, 개념적 사고를 오래된 직업병처럼 갖고 있다. 철학자 구보 씨의 강의에 대한 평가에도 위와 같은 평이 달렸었다. 문성원 교수가 철학자 구보 씨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내고, 발가벗겨 보고, 진실한 말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 이유는, 이제 “쉬운 얘기를 쉽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처지 내지 철학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투(苦鬪)인 것이다.

철학의 남은 문제는 무엇일까? 존재 아닌 윤리!

문성원 교수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지적과 같이 철학에 남은 과제를 가치(규범)의 영역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은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룬다. 인식론적 문제들은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결국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오히려 철학의 본래 영역에 가깝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저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함을 역설한 책이 <대화편>이다. 문성원 교수 역시 철학자 구보 씨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철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철학에 남아 있는 문제가 바로 가치의 영역, 규범의 영역이라 보기 때문이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여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253쪽)
결국, 철학자 구보 씨는 철학의 제1의 문제인 가치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을 탐색하고자 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세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 영역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주제들을 탐색하기 위해, 현대 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생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영역들을 탐색한다. 바로 사유라는 철학의 무기를 가지고 말이다.

문성원 교수는 철학자 구보 씨를 여러 가지 알레고리로 표상하였다. 무엇보다, ‘벌거벗은 누드모델’이 표상하는 바를 보자. 구보 씨는 무엇보다도 ‘누드모델이’ 되기를 꿈꾼다(문성원 교수는 구보 씨의 생각을 빌려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누드모델이 아닐까 하고 쓰고 있다). 이때, 벌거벗음(노출)은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푸코의 용어)로 이어지며, 또 벌거벗음은 초월, 즉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철학자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꿈꾸는 이유는, 진실한 말하기 혹은 초월(새로움의 추구)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또, 구보 씨는 뱀파이어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주로 존재와 진리, 의미와 주체 등을 논하는 대신, 이 책에서 철학자 구보 씨는 누드모델, 뱀파이어, 크기, 동물 등 낯선 영역들을 탐색한다. 그렇지만, 조르조 아감벤이나 질 들뢰즈의 논의에서 진행된 이러한 주제들이 생소하지만 사소한 것은 아니다. 아감벤식으로 보면 벌거벗음의 사유, 들뢰즈식으로 보면 뱀파이어의 사유, 스티븐 제이 굴드식으로 보면 크기의 사유이다. 또, 동물과 인간성, 식육과 채식에 대한 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문성원 교수는 유쾌한 상상력으로 철학자 구보 씨의 벌거벗은 사유를 펼쳐 보여,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고자 한다.

벌거벗음의 사유, 유쾌한 상상력으로
‘돈의 맛’ 아는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다!


구보 씨, 벌거벗다!
구보 씨가 탐색하는 첫 번째 영역은 벌거벗음이다. 구보 씨가 생뚱맞게 누드모델이 되겠다고 꿈꾸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옷을 입는 것은 인위이고 과잉이다. 히피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하지 않다. “오늘날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라고 구보 씨는 본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 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영화감독)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라는 얘기다. 그래서 수치란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라고 본다. 구보 씨는 디나 알 카심(주디스 버틀러의 제자)이라는 여성 학자와의 가상(꿈) 대화를 통해, 노출(벌거벗음)을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진실한 말하기)라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이것을 ‘노출’과 연관 지으면,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것”이고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이 될 것이다. 이후의 구보 씨와 디나 알 카심의 담화를 통해,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구보 씨는, 벌거벗음을 초월과 연관짓는다. 옷을 입는 것은 현재의 차원을 지키는 것이고,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것을 준비한다. 만일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것은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새로움의 추구를 지속해야 한다.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있었던 것이다.

구보 씨, 소통하다!
구보 씨는 소통을 생각한다. 소통 부재의 사회가 돼버린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막연한 것이었을까?
구보 씨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한 존 그레이(『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의 논의에서 시작해 본다. 자연은 인간을 지푸라기 개(추구, 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라는 얘기다. 자연과의 소통은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구보 씨는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맑스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윤구병 선생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명제는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 폐쇄성을 공격해 온 지도 오래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소통은 그저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원전 등)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고 구보 씨는 덧붙인다.

구보 씨, 뱀파이어가 되다!
구보 씨의 세 번째 탐구 영역은 뱀파이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물론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돈은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뱀파이어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대비시키기 위해, 이와 관련된 문학, 예술 작품들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들뢰즈의 『카프카』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그리고 영화 「박쥐」나 「렛미인」 , 그리고 <나꼼수>를 들어, 뱀파이어의 여러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유비시킨다.

구보 씨는 먼저 ‘흡혈’의 개념을 연결시킨다. 질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같이 쓴 『카프카』라는 책에서, ‘흡혈’의 개념을 들었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 구보 씨에게 이른 셈이다.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려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113쪽)

또, 뱀파이어는 경계 외적 존재이다. 하지만 체제 내적 관점에서 보아서 그렇다. 세상이 선이라면, 뱀파이어 같은 괴물은 악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일종의 체제 내 수법과 같다.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친다. 또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다. 예컨대 <나꼼수>의 경우,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 모른다. ‘쫄지 마’라는 구호는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다.

뱀파이어는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를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는 구보 씨는,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의 세계와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나란히 간다고 생각한다. 내재와 초월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은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고 구보 씨는 생각한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뱀파이어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 「렛미인」에서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치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구보 씨는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하고 덧붙인다.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
구보 씨는 사회적 크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100여 명 정도, 많아야 200명이 못 되는 규모의 집단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제 아무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백 명 남짓이다. 군대로 따지면 중대 규모의 집단이 정서적 교감을 지니고 가장 큰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 단위이다. 그런데 집단이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서로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고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곤란해진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생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삶을 꾸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사회 환경, 심정과 사회 조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189~190쪽)
이 점은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자유주의냐 공동체주의냐를 나누는 차이도 여기서 나타난다. 구보 씨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문제를 도외시해 왔고, 인간을 일종의 레고 조각처럼 보고 필요에 따라 이어다 붙이면 어떤 규모의 어떤 사회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왔다고 비판한다. 공동체 단위에 대한, 즉 코뮌 단위에 대한 생각이 없다.

구보 씨는 생물의 크기에 대해 생각한다. 구보 씨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에 실린 ‘크기와 형태’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언젠가 나는 뉴욕 시의 어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소녀 둘이 개의 크기를 따지고 있었다. 한쪽이 물었다. “개가 코끼리만큼 자랄 수 있을까?” 다른 아이가 대꾸했다. “아니야. 코끼리만큼 커지면 모양이 코끼리 같을 거야.” 정곡을 찌른 대답이었다.

지상의 동물들은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형태상의 제약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거미나 벌이 일정 정도 이상 커지면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 대왕오징어나 고래처럼 거대한 생물은 중력의 부담이 적은 물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꼭 크고 복잡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구보 씨는 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이 이 지구의 지배적인 생물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견이라는 것이다. 굳이 지구에 주인인 생물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박테리아 같은 종류다.

구보 씨는 먹는 것과 크기를 연관시킨다. 먹는 행위는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 내는 절차다. 철학적으로 풀자면, 타자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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